순교자

성 이윤일 요한

이미지 성 윤일(尹一) 이제현(李齊賢) 요한은 충청도 내포지역의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태어날 당시 시작된 을해박해(1815년)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많은 이들이 잡혔고 그중에 몇 명은 경상감영에서 옥사하였다. 대구지역 박해 시작과 더불어 성인은 탄생하신 것이다. 성인의 부친 대(代)에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성인의 가족들은 신앙과 용기로 항상 빛났던 사람들이었다. 성인의 아들 시몬은 아버지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에 예천 건학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성인은 키가 큰데다가 길고도 숱이 많은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위풍이 당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인의 성품은 순량하여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한 번도 성내는 일이 없었던 성인은 부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 외인들이 그를 위하여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고 할 정도였다.

성인은 고향이었던 홍주를 떠나 상주 갈골에 살다가 부친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성인의 처가 집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문경 호항리(여우목)로 이사를 갔다. 여우목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성인은 온후한 성품과 독실한 신앙으로 수계 생활도 열심히 하였다. 성인은 그곳에서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천주교회에 입교시켰고 신자들을 잘 이끌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포졸들이 여우목으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올 때가 온 것이라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의 대표자가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 하고 묻자 성인은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포졸들이 와서 성인의 손을 묶자, 성인은 침착하게 “이렇게 아니하여도 나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수갑을 늦추어 달라.”하였다. 그리고 성인의 여덟 식구와 동네 교우들을 합쳐 약 30여 명이 문경 아문에 갇혔다. 당시 문경 현감은 신자들을 잡지 아니한 죄로 면직이 되어 현감 자리는 공석 중이었다. 현감이 없자 포졸들이 성인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하였고, 때리지는 않았지만 세간은 다 빼앗겼다. 문경에서 3일 동안 있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갔다. 성인이 상주 진영에 잡혀 있을 때 잡혀 온 이들은 약 70여 명이 되었다. 그 중에서 약 20여 명 이상이 치명하였다.

이미지 상주 진영에서 성인은 큰 칼을 쓰고 차꼬를 채인 상태로 한 두어 달 갇혀 있으면서 문목을 받았다. 성인이 상주 감영에 있을 때 원(牧使) 앞에 3차례 문목을 받는다. 원이 “교우들이 어디에 있느냐?” 묻자 “교우들은 여기 들어 온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지금도 성교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아니 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원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네가 회장이니, 네만 아니하면 다른 사람도 아니할 것이다.” 포졸들에게 큰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에 성인의 두 살 난 손녀가 죽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인은 교우들 중에서 마음이 변하는 자가 있으면 열심히 권면하여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고, 성인의 지도로 함께 옥중에서 아침저녁 기도를 그치지 않고 하였고, 항상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상주감영에서는 끌고 온 신자들을 세 편으로 갈라놓는다. 빈곤한 사람과 여자와 어린 아이들처럼 풀어 줄 사람,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을 하여 죽어야 될 사람, 성인과 한실 공소 회장 김예기 형제처럼 사학 괴수라 하여 따로 사형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 때 성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와 모친과 누이가 풀려 나온다. 그러다가 성인이 대구로 참수 당하러 갈 때 자손들을 불러 이렇게 훈계한다. “나는 이제 치명하려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 그리고 치명하는 장소에는 따라오지도 말고 치명하는 장면은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인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다시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성록’ 고종 병인년 11월 29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 경상 감사 이삼현의 장계를 보니, ‘문경 고을에서 잡힌 사학 무리 중에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세 명은 사학에 매우 깊게 빠진 자들이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많이 모은 뒤 효수(梟首)하여 모든 사람들을 경각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학 무리들을 먼저 목 베고 후에 장계함이 일찍이 행한 일이 있은즉 이후로는 굳이 품처하지 말고 해당되는 율로써 형벌을 행한 후에 장계하여 드릴 것을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의정부에서 왕께 아뢰니 왕이 윤허하였다.

이미지 상주에서 경상감영으로 끌려온 지 3일 째 되는 날,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에 각각 그 날 음식상을 한 상 씩 받았다. 그러자 김회장 형제 두 사람은 먹지 않고 울었다. 그러자 성인이 “천주가 먹으라 하신 음식을 먹지 않고 울긴 무슨 연고이냐?”며 권면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한다. 성인과 김예기, 김인기 형제는 영장이 먼저 나와 앉아 있던 관덕당 앞으로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사형 터에는 막대기 넷이 땅에 박혀 있었다. 포졸들이 묶인 것을 풀어 주었고 첫 차례로 성인이 죽을 때가 되자 성인은 자기 주머니에서 엽전 닷 냥을 자신에게 쓸데없는 것이라며 희광이에게 주면서 “여보게 이것 받아 주게. 내가 죽는 마당에 이것을 품속에 넣은 채 죽겠는가? 저승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 없다네. 그러니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들에게 주는 게니 받아주게. 자네들이나 나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 한 칼 단번에 내 목을 잘라주게.”고 하였다. 그 후 희광이가 성인을 엎드리라고 하면서 손으로 치자, 성인은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성호를 긋고는 스스로 엎드려 나무토막을 목에 괴고, 사지를 각각 잡아매라 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관덕당 형장에서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당시 성인의 나이는 52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처음에는 이곳 관덕당 형장 근처에 임시로 묻혔다. 성인의 머리를 따로 효수하지 않아서 몸과 함께 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두 달 후(음력 2월) 성인의 아들 마티아와 마티아의 형과 외숙부와 이 토마스가 와서 봉분을 크게 만들었다. 2년 후 후손들에 의해서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그 후손들이 경기도 용인군 묵리(墨里 = 먹방이 = 먹뱅이 = 묵뱅이)로 이사를 가서 1912년에 그곳으로 이장을 했다. 이미지 그 후 다시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이장했다. 1985년 대구교구 신자들이 미리내 성지 순례를 할 때 해설자에 의해서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된 18위 중 한 분이 성인이라는 것을 듣고, 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님이 조사 검증하고 확인하였다. 성인의 묘소가 확임 됨에 따라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와 수원교구장인 김남수 주교, 미리내 성지 정행만 신부의 합의에 의해서 대구대교구로 이장하게 되었다. 대구로 이장된 성인의 유해는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구내 성모당으로 안치했었고, 대구대교구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이날 성인을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모실 것을 반포하셨다. 그러다가 성인의 유해는 1991년 1월 20일(일)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하였다.

한국의 병인 순교자 24위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김수환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1968년 10월 6일 시복될 때, 성인도 복자가 되었다. 그 때 교황은 바오로 6세였다. 이후 성인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서울 여의도에서 더불어 시성(諡聖)되셨다. 성인은 우리나라 103위 성인 중 가장 끝에 소개되어 있는 분이다.

※ 성 이윤일 요한과 관련된 순례지
가. 충남 홍주, 덕산
다. 경북 문경 여우목
마. 경북 상주 감옥터
사. 대구 서구 날뫼(비산동)
자. 경기 용인 미리내
나. 경북 상주 갈골
라. 경북 문경 관청
바. 대구 중구 아미산(관덕정)
아. 경기 용인 묵리(먹뱅이, 이동면)
차. 대구 중구 성모당(남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