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1838? ~ 1868)

손태경 2019.04.01 16:55 조회 수 : 323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1838년경 경상감영 아전의 아들로 날뫼, 즉 지금의 비산동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풍병(風病)을 앓아 이목(耳目)이 삐뚤어져 있었다. 경상감영 아전의 아들이었던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천주교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뒤인 16세가 되던 해였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두 여동생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어머니는 수산나, 여동생들은 각각 프란치스카, 데레사, 자신은 알로이시오 곤자가로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에 입교한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미신을 모두 끊어 버리고, 동정으로 살아갈 결심을 했다. 그의 모친 수산나가 혼배를 권유할 때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물리쳤다.

해가 갈수록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동정을 지켰음은 물론 아주 검소한 생활을 했고, 죽어 가는 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데도 열심이었다. 하루는 병자가 있는 집을 찾아가 대세를 주었는데, 그 병자가 알로이시오 곤자가를 보면서 오라버니가 쓴 갓과 끈이 아름다운 꽃과 구슬입니다.”라고 하면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고 한다.

그 후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재산 일부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준 뒤, 남은 재산을 가지고 칠곡 한티 교우촌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교회 서적도 정성으로 필사하고,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교리를 문답했으며, 묵상과 기도 생활에도 열중했다. 또 성호경을 드릴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애통한 마음을 드러냈다.

평소에도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고신극기(苦身克己)에 열심이었다. 사순 시기가 되면 모친이 걱정할 정도로 재()를 열심히 지켰고, 삼구(三仇)의 하나인 육신을 미워하여 자신의 몸을 편태로 치기도 했다. 모친이 걱정스러운 말을 하면, 도리어 죄가 많고 흉한 육신이니, 이를 보속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쓰겠습니까?”하는 말로 모친을 위로하곤 했다.

그러던 중 병인박해(1866)가 일어나자, 교우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도 이때 한티를 떠나 대구로 이주해 살았다. 어느 날 서울의 포교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대구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친과 여동생이 피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이렇게 좋은 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간곡한 모친의 권유를 저버릴 수 없었으므로 마지못해 경산 하양으로 피신했다.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체포된 것은 대구성 밖 십리 쯤에 있는 한 비신자의 집에서였다. 곧장 대구 관아로 압송되어 목에 칼을 쓴 채 옥에 갇힌 그는 한 포교에게 내가 아무개에게 받을 돈이 있으니, 이를 받아서 내 빚을 갚아 노모가 걱정하지 않게 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옥중에서 교우들과 함께 아침 저녁기도와 여러 가지 기도를 바쳤다.

이후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서울로 이송되었다. 이송 도중에 소리 내어 교리를 외웠으며, 기쁜 얼굴로 포교들에게 교리를 설명했다. 또 아는 사람을 만나자 모친을 만나면 위로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서울 포도청에 도착한 그는 옥에 있는 교우를 보고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살아 있느냐?”고 말했다. 또 옥졸들에게는 천주 교리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믿어야 할 교리이니, 당신들도 이를 믿으시오.”라고 권유했다. 이러한 그를 두고 포교와 옥졸들은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천주학쟁이 가운데 제일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때는 무진년(1868)으로, 그의 나이 3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