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순교지

관리자 2020.06.09 11:43 조회 수 : 269

신라시대에는 『달구벌천도』(達句伐遷都) 계획으로 신라의 왕도(王都)를 대구부근으로 옮기려 했던 만큼 지정학적(地政學的) 가치가 큰 대구(大邱)는 조선조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98)으로 군사적인 면에서도 그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어 1601(宣祖 34)년 경상감영(慶尙監營)이 대구에 정착되고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가 됨으로써 영남지방의 행정 군사 경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구읍성
대구부(府)의 읍성은 1590(宣祖23)년 토성(土城)을 쌓아 이듬해에 완성했으나 1년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헐어 깨뜨려져 경상도 감영이 설치된 도호부이면서도 135년간 읍성 없이 지나다가 1736(英祖12)년 당시의 경상도관찰사(觀察使=監司)겸 대구도호부사(都護府使) 민응수(閔應洙)의 건의로 영조(英祖)의 윤허를 얻게 되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때 축조된 성벽은 석성(石城)으로 과거 훼파된 토성보다 규모가 커져 동서남북의 넷 정문이 있고 또 동과 서의 두 암문(暗門=樓없는 門)이 있었다. 즉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그 위치는 현 동성로와 동문로가 교차되는 제일은행앞 십자로에 있었고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서성로와 서문로가 교차되는 조흥은행앞 십자로에 있었다.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의 현판이 걸린 2층 누각의 건물이었는데 그 위치는 남성로와 종로가 교차되는 십자로에 서 있었고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으로 북성로 31번지와 태평로 2가 13번지로 개통되어 있는 3거리, 북성로 31번지에 있었다.
동소문(東小門)은 『동야문』 이라했고 동성로 대구백화점앞 3거리에 있었다. 서소문(西小門)은 『서야문』이라 했는데 서정문인 달서문(達西門)에서 북으로, 서성(西城)의 북쪽 끝에서 그안에 감영옥사(監營獄舍)가 있는 『옥골』 골목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었다.
대구읍성 성곽 위에는 4개의 망루(望樓)가 있었는데 성곽 축조공사는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약 6개월 만에 완성하였는데 동원된 연인원은 78,584명이라 하며 소요되는 물자의 대금과 노임을 후하게 지불했다고 한다. 완공된 1737년 『영남감영축성비』(嶺營築城碑)를 세웠다. 그후 133년이 된 1870(高宗7)년 김세호(金世鎬) 감사의 재임시에 성벽의 증수축(增修築)이 있었는데 이때 종래의 4개 망루 외에 새로 8개의 포루(砲樓)를 증축하였다.
그러나 대수축후 24년만인 1906(高宗43)년 대구군수겸 관찰사서리 박중양(朴重陽)은 『쓸모없이 도시발전에 방해된다』고 일본인들과 손잡고 대구읍성을 철거함으로써 축조된지 170년만에 그 자취는 없어지고 현재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하는 도로이름으로 옛 성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관덕당
관덕정(亭)으로도 불리는 관덕당(觀德堂)은 1749(英祖25)년 경상도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 민백상(閔百祥)이 건립한 별무사(別武士)와 군관(軍官)을 선발하는 도시소(都試所)였다. 그 위치는 대구읍성 남문(嶺南第一關) 밖 서남200보 지점(대구시 중구 桂山동 2가 245번지) 즉 동아쇼핑센터 북서 모퉁이 부근이다.
별무사는 활(弓) 잘쏘고 말(馬) 잘타는 특별 기량을 가진 군인으로 조선의 오위영(五衛營) 중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에 배속되고 전시에는 일선에서 싸웠다.
도시(都試)란 조선시대 무과의 시험제도이며 중앙에서는 병조판서와 훈련도감의 당상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각 진영의 병마절도사가 매년 봄과 가을에 무사를 선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성적이 우수한 자는 상을 주고 임금이 친림하여 보이던 전시(殿試)에 응할 자격을 주었다.
나라 지키는 간성들을 길러내는 구실을 해온 관덕당의 건물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고 국력이 빈사 상태이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퇴락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회원이며 『광문사』(廣文社)를 설립, 『나라의 힘, 국민의 힘을 기르는 운동을 전개하던 지사(志士) 김광제(金光濟)는 서상돈(徐相燉=아오스딩)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설립하는 일과 민중을 계몽하는 일에 열중했는데 때마침 이해 1월에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 감사는 광문사와 상의, 각 군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관덕당 건물을 수리하여 사범학교를 설립코져 했는데 이때 서상돈 정규옥(鄭圭鈺=바오로) 서병오(徐丙五) 등 각 500원(元)씩을 거출한 20인과 3~4십원씩을 의연한 65인의 대구유지들의 협력으로 사범학교를 개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방해로 신감사는 부임 6개월만에 면직되고 학교는 문을 닫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구읍성이 철거될 때 남문옆에 세웠던 『영남감영축성비』는 관덕당으로 옮겼다가 관덕당이 헐릴 때 동성로의 달성군청으로 옮겨졌고 다시 남산동 『향교』(鄕校)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관덕당 마당
관덕당 마당은 현재 적십자병원이 자리잡고 있는 전후좌우 일대와 동아쇼핑센터 앞에서 반월당 로타리 아미산(峨媚山) 이라 부르는 언덕 밑 전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다.
무과(武科) 과거를 보이는 연병장이었으므로 활을 쏘는 사격장, 말을 달리는 승마장으로 사용되고 또 세시민속 놀이의 줄다림도 이곳에서 했다한다. 넓은 큰도로가 개통되기전인 1920년대에는 현재 YMCA회관이 선 자리에 물방아간이 있었고 여기서 흘러내리는 물이 개천이 되어 염매시장을 지나고 고려예식장 앞길 중앙으로 흘러 계산오거리에서 북으로 굽이쳐 계산성당 앞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굽이쳐 동산밑에서 서현(西峴)쪽에서 내려오는 개천과 합류하여 달서교(동산파출소앞)와 인교동을 지나서 달성동으로 흘렀는데 이 물이 관덕당 앞에서 동산밑으로 합류할 때까지 유로는 남산동과 계산동의 경계선이 되기도 했다.
관덕당 마당은 1917년 8월 동문 시장의 일부가 옮겨오고 1919년 7월에 또 다시 동문시장 나머지 일부가 옮겨와서 새장(新市場) 또는 남문시장으로 1937년 3월까지 장터가 되었다가 남산동으로 시장이 옮겨간 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관덕당 마루
『관덕당 마루』 또는 『관지(官地)땅 말랭이』로 불리우던 아미산(峨媚山) 등성이는 관덕당 앞을 흐르는 개천을 건너서 언덕밑까지가 140보의 거리인데 현재 아미산 언덕위에는 동쪽에 대한불교 대구거사림(居士林) 절이 있고 서쪽은 장로회 대구남산교회가 서있고 중간에는 복명국민학교가 덩그랗게 자리잡고 있다.
토박한 언덕바지로 쓸모없는 땅으로 조선조시대에는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으로 사용해 왔으므로 대구에서 참수치명하신 천주교 순교자들도 이곳에서 목숨을 바쳤을뿐아니라 동학(東學) 운동을 일으킨 최제우(崔濟愚)도 1864년 이곳에서 사형되었다 한다. 또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항거하는 우리의병(義兵)들을 잡아 총살하는 형장으로도 삼았기 때문에 『관덕당말랭이』는 형장의 대명사(代名詞) 이기도 했다. 남산교회앞 길에서부터 동편일대가 옛날의 형장이라 하는데 그후 이곳에는 측후소(測候所)가 세워지고 한편 남문시장 옹기전이 되기도 하였다.

관덕당마루 형장의 순교자들
대구에서 치명한 천주교 순교자들은 신유(辛酉1801)교난 후 박해를 피하여 경상도 북부 산협지대에 숨어살면서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던 신자들이 배교자의 밀고로 영양, 청송, 진보 등지에서 모두 체포되어 먼저 그고을 현감 또는 부사의 초심(初審)을 받아 배교한 사람은 방면되고 그 상급관청인 안동, 상주, 경주의 목사와 대부사의 재심(再審)을 거쳐 두령이나 이름난 신자는 감사의 아문인 대구감영으로 넘기고, 보통죄수는 즉결 처형하게 되었는데 을해년에 대구로 압송된 이는 29명이다. 이때 경상도에 숨어들어와 신자취락을 이루었던 교우들은 충청도 홍주, 덕산, 예산, 청양, 내포 등지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815(乙亥)년에 청송 「모래산」에서 잡혀 경주를 거쳐 대구로 이송된 7위중 네분은 옥사하고 3위가 참수, 진보 「머루산」에서 잡혀 안동을 거쳐 대구로 압송된 4위는 모두 참수형으로 1816년 1월 19일 관덕당 마루에서 순교하였다. 1927(丁亥)년 상주 「명의목」과 순흥 「곰지기」에서 잡혀 상주목사의 심문을 거쳐 대구감영으로 이송된 6위중 세분은 옥사, 세분이 참수. 이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중앙의 결재가 없어 13년간 옥고 끝에 3위는 옥사하고 세분이 1839(己亥)년 5월 26일 관덕당 마루에서 참수되었다. 병인(丙寅=1866) 대교난 때는 선참후계(先斬後啓)라는 『학살령』이 내려져 각 지방에서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어 절차를 밟아 감영까지 이송된 이가 많지않고 문경에서 잡혀 상주목사의 심문을 거쳐 호송된 이윤일(李允一 사도요한) 성인과 김회장 형제 세분이 1867년 1월 21일 관덕당 마루에서 순교하였다.

대구 감영옥
어둡고 더러운 옥사 안에서 사형집행을 고대하는 사람들, 그 처절한 가운데서 단란하고 화기애애하고 기쁘게 살고 있는 모습.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기고 낮에는 둘러앉아 새끼를 꼬고 집신을 삼아 생활비와 필수품을 마련하고 밤이면 희미한 호롱불 앞에서 정성스럽게 기도를 함께 올리는 경문소리.
그들을 밀고한 원수까지 따뜻이 돌봐주는 사랑. 이러한 대구감영옥에 있는 천주교신자들에 대한 소문은 대구읍민들의 호기심과 화제를 불러일으켜 구경하러 오는 사람과 『천주교가 무어길래』 하고 교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로 옥중전교(獄中傳敎)를 한 대구감영의 옥사는 「서야문」 안 옥골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대구시 중구 서내(西內)동 8번지다. 한일합방후 삼덕동에 대구 형무소(刑務所)가 생기게 되자 옥사는 없어지고 그터에는 일본불교의 절이 세워졌다가 8.15 광복 후는 여러기관들의 소유로 전전하였고 지금은 장로회 대구 서성로 교회가 세워져 있다. 순교유적지로 말하면 관덕당 마루보다 옥터가 더 순교자들과 연고가 깊은 곳이다. 대구의 순교자들은 옥사자가 더 많고 모든 순교자들이 일단 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한티마을
한티마을(漆谷군 東明면 得明동)은 대구 천주교회의 요람지 신나무골(漆谷군 枝川면 蓮花동 24)과 함께 대구본당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신자들이 박해시대에 그곳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깊은 산중 취락이었다.
태백(太白)산맥의 남단. 대구북방 20km 지점에 위치한 팔공산은 대구분지(盆地)의 북부를 둘러싸고 동서로 길게 산줄기를 뻗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어 행정상으로 경북 칠곡 달성 경산 영천 군위 등 5개군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주봉(主峯) 팔공산은 해발 1,192m이며 1,036m의 동봉과 1,041m의 서봉을 전위로 거느리고 사방으로 능선을 가르는데 주봉 팔공산에서 서북으로 파계봉(把溪峰900m) 파계재 한티재 산성(山城)이 있는 가산(架山901m)에 이르는 능선은 그 길이가 20km이며 『한티마을』은 파계재와 한티재 사이의 능선 북서쪽 원지곡산(遠志谷山-일명 大峴洞) 골짜기에 위치 한 두메마을이다.
한티(大峴)에 천주교신자 취락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30년대에는 신자들 사이에 알려진 피난지로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신앙의 안전지대를 찾아서 남하하는 실향(失鄕) 신자들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그래서 1850년부터 영남지방 전교를 맡았던 두 번째의 방인사제 최양업(崔良業 토마)신부와 1816년 후반부터 영남지방 전교담당자이던 다블뤼(A.Daveluy安敦伊) 보좌주교가 한티(大峴)를 순방하고 성무를 집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선대목구 제4대교구장 베르뇌(S.Berneux張敬一)주교는 1862년도 성무집행보고서에 『칠곡고을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작은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하였다.
지리적으로 높고 깊숙한 한티는 박해시대의 신자들 피난처로서 옹기굴도 마련되고 화전(火田)으로 일군 농토도 개척되어 당시 대구의 신자들은 교난(敎難)의 기미가 보이면 즉시 한티로 은신하였고 박해의 피바람이 가시었다고 짐작되면 다시 생활터전으로 돌아갔는데 이웃 외교인들에게는 먼지방에 장사하러갔다가 돌아온 것처럼 했다고 한다. 『신나무골』 신자들도 포졸들이 덮치는 위급한 때는 10리와 40리 거리를 두고있는 『어골』(於巨洞)과 『원당』(元堂里) 그리고 한티로 피신했다. 『어골』과 『원당』은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지점이다. 1861(哲宗12)년 이때 한양과 그 인근지방에는 박해가 없는 소강시대였는데도 칠곡지방에는 갑자기 『신나무골』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이때 배손(裵孫)의 가족 5명도 『여붓재』(餘火峴) 쪽으로 도망쳐 『흑다리골』로 피신했으나 뒤쫓는 포졸의 추격으로 『갈골』(架山城쪽)로, 또 가산의 높은(901m) 등을 타고 한티(大峴)의 옹기굴에 숨었으나 끝까지 추격해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죽어도 천주님은 배반 못한다』고 한 이선이(李先伊 엘리사벳) 부인과 맏아들 배도령(이름과 灵名 未詳16세)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또 상주 살던 풍양조씨(趙氏) 가롤로는 천주교를 믿는것 때문에 문중에서 추방되어 여러지방을 전전하다가 한티에 정착했으나 병인대교난 시기인 어느날 한티에도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조가롤로는 순교하여 한티 땅에 묻혔으며 그 후손들은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대구로 전출했는데 후손중에는 조차성(趙且成바오로 1926년叙品) 신부가 있다. 한티에는 이름없는 순교자 무덤들이 여럿 있고 금교령(禁敎令)이 해제된 후에도 지방적 사군란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이 있다.
윤광선, 『새하늘 새 땅을 여는 빛』통권 제45호 (19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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