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박해(1815)

관리자 2020.06.09 11:34 조회 수 : 170

  신유박해로 수많은 지도자와 신자들을 잃은 한국 교회는 이여진(요한), 신태보(베드로),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 홍낙민(루가)의 아들인 홍우송 등에 의한 교회 재건 운동이 시작되고, 성직자의 영입을 위해 1811년 말 이여진과 그 일행은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보내는 두 개의 서한을 가지고 북경에 갔다. 이 서한은 1814년 라틴어로 번역되어 교황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과 중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때문에 북경 주교는 이들의 청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1814년 전국적으로 수해와 기근이 심각했으며, 특히 영남지방이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전지수라는 배교자가 신자들을 밀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의 탐욕과 중앙의 지시도 없이 지방관의 자의로 1815년 경상도 북부지방과 강원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을해박해가 일어났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곳은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이었다. 이곳에는 때마침 예수부활축일을 맞이해 각지에서 많은 교인들이 와 있었다. 이때 체포된 고성운(요셉), 고성대(베드로), 구성열(바르바라), 최봉한(프란치스코), 서석봉(안드레아),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 안치룡 등 40명이 경주 진영으로 압송됐다.
  며칠 뒤 포졸들은 청송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서 김시우(알렉시오), 이시임(안나)과 그의 아들 박종악, 김흥금, 김장복 등 24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하고, 3월에는 일월산에 있던 영양의 곧은정을, 4월 23일에는 우련밭 교우촌을 급습하여 김종한(안드레아), 김희성(프란치스코) 등 8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동북부 지방 신자들 중 72명이 체포되고, 그 중 34명이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1815년 6월 18일 경상감사 이존수가 신문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다. 최봉한, 김윤덕, 김악지, 김진성은 이때 이미 옥사했으며, 나이 어린 김문악은 별도로 범한 바가 없으므로 석방하고, 나이가 많고 배교한 방만동과 어린아이 박종악을 제외한 나머지 27명에 대해 사형을 품신했다.
  같은해 7월 7일 조정에서는 배교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사형하라는 회시를 보내어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선복 등 11명이 배교했고, 신광채, 심경, 김광억, 박종악과 배교했던 방만동 등은 옥사했으며, 김종한, 김희성, 김시우, 김화춘(야고보), 고성대, 고성운, 이시임, 서석봉, 구성열, 안치룡, 김광복, 김흥금, 김장복 등 13명은 1815년 10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두 차례 더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형 확정 판결 전에 안치룡, 서석봉, 김시우, 김흥금, 김장복, 김광복 등 6명이 옥사했다. 결국 1816년 10월 21일 김종한, 고성운, 고성대, 김희성, 김화춘, 구성열, 이시임 등 7명의 사형이 결정되고, 그해 11월 1일 경상감영의 사형장인 아미산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