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박해 이후 상황

관리자 2020.06.09 11:35 조회 수 : 72

  정해박해 이전부터 시작된 조선 신자들의 청원과 북경 주교의 협력으로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 조선 포교지를 맡아주도록 제의했다. 전교회의 사정으로 이 제의가 곧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샴(Siam)대목구 부주교가 조선 선교사로 자원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열게 됐다. 조선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창설된 46년 만인 1831년 9월 9일, 교황청은 조선을 교황 대목구로 설정했다.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교황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 조선대목구를 북경 주교로부터 독립시켰다. 한국교회는 비로소 교황대목구라는 교계제도에 의해 지탱되고 확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본국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로 갔지만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1835년 말 만주의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개척한 입국로를 통해 1836년 초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이때 조선에는 그보다 1년 전에 입국해 있던 중국인 여항덕(파치피코) 신부가 있었다. 모방 신부는 입국한 지 1년 후인 1836년 말에 여항덕 신부를 중국으로 귀환시키고, 최양업(토마스), 최방제(F.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어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이 때 이들을 국경까지 인도한 조선 신자들을 통해 샤스탕 신부가 입국했고, 1837년 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도 의주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1838년 초 조선에서는 프랑스 선교사 3명이 활약했다. 이들 선교사들은 전국 68개 지역에 걸쳐 확산된 신자들을 방문해 성사를 집행했으며, 회장이나 신자 대표를 선임함으로써 교회가 조직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그 동안 영입된 선교사들은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당시의 기록인 『긔ㅣ일긔』에 따르면 전국에서 신자 54명이 참수당하고 60여 명이 옥사했다. 특히 이 시기에 1827년 정해박해 때 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 수감 중이던 이재행, 박사의, 김사건 등 3명이 대구에서, 정태봉(바오로) 외 4명이 전주에서 각각 참수되어 순교했다. 전라도 고산 등지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돼 박춘하 외 20여 명이 처형되었다. 기해박해는 전국적인 박해였으며, 특히 경기도와 서울지역이 가장 심했다.
  기해박해 이후 1845년 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와 다블뤼 신부를 동행, 조선에 들어오면서 한국 교회는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1846년 초 페레올 주교는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해상로를 개척하기 위해 김대건 신부를 황해도 연안으로 파견했으나 그곳에서 뜻밖의 사고로 김대건 신부는 지방 관헌에게 체포되면서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신자들의 체포에 그쳤으므로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 선교사들은 지방으로 피난하는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 신앙을 지탱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철종의 천주교 관용정책으로 인하여 전국 각 지역의 공소가 이 시기에 많이 형성됐고, 한국 천주교회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