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1866-1873)

관리자 2020.06.09 11:36 조회 수 : 392

  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김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1857년 8월 4일 70세로 사망했다. 철종의 장인 김문근마저 1863년 11월 사망하자 조 대왕대비 신정왕후 세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달 뒤인 12월 8일 철종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자 후사가 없는 것을 기회로 조 대왕대비는 앞장서서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1863년 12월 13일, 제26대 왕으로 즉위한 고종은 그때 나이 12세였다. 당시 정치는 표면상으로는 조 대비가 하는 것 같았지만, 모든 실권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에게 있었다. 고종이 즉위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안동 김씨의 세력은 깨끗이 밀려났다. 그 대신 풍양조씨 일파가 대궐 안에서 활개를 쳤다. 이들의 득세는 천주교의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후 14년에 걸쳐 안동 김씨 세력 밑에서는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가 거의 없었다. 전교 활동도 활성화됐다.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12월에는 베르뇌 주교를 포함해 8명의 성직자가 조선 교회에서 활동했으며, 신자는 2만 3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 10년은 천주교에 결정적인 철퇴가 내려진 시기였다. 대원군은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남하정책을 계속 추진하자 베르뇌 주교의 교섭에 의해 프랑스의 도움으로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866년 초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가 그의 계획 실행에 협력하기 어렵게 되자 천주교신자 탄압을 결심, 선교사 체포령을 내렸다. 이 선교사 체포령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는 비극을 낳았으며,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됐다. 조선 천주교회는 1866년부터 1873년에 이르는 병인박해 기간 동안 사상 최대의 시련을 겪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 천주교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는 사라졌다. 천주교와 관련돼 치죄된 전직 관리들도 복권됐다. 1874년 5월 20일 고종은 특명을 내려 천주교신자들에게 많은 돈을 대준 정언이었던 조철증 등의 죄를 사면했다. 고종의 이 결정에 대해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홍문관 등의 여러 관장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그들의 복권을 강력하게 명했다.
  그러나 고종 집정 이후에도 외교조약이 맺어지는 1880년대 후반까지는 전국에서 사사로운 박해는 계속됐다. 신자들은 이후 30여 년 동안 박해자들과 대결하거나 피신해 살면서 믿음을 지켜야 했다.
  병인년에 시작된 대박해를 거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전국적으로 8천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순교자는 경기도 74명, 충청도 336명, 황해도 25명, 전라도 33명, 경상도 43명, 함경도 18명, 평안도 1명, 강원도 1명 등이다.
  경상도에서는 신석복(마르코), 이윤일(요한), 김예기, 김인기, 서태순, 정찬문(안토니오), 이정식(요한), 이관복(프란치스코), 박소사(마리아), 이삼근(베드로), 차장득(프란치스코), 양재현(마르티노), 허인백,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박대식(빅토리노) 등이 순교했다.
  전라도에서는 김사집(필립보), 김영삼, 임관서(베드로), 장윤경(야고보), 한경영, 김성화(야고보), 김흥칠(마티아),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 조윤호(요셉), 정원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이명서(베드로), 손선지(베드로), 조화서(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에 대한 순교 사실이 전해져온다.
  경상도 출신으로 다른 지방에서 순교한 사람은 김사집, 김원서, 안정서, 이상서, 김순문 등이다.
  또한 대구와 신나무골 신자들이 한티에 피신해 있다가 1868년 40여 명이 거기에서 순교했다. 한티에 살다가 순교한 이들은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다. 조 가롤로와 그의 가족 정도가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에는 순교자 877명이 수록돼 있다. 이들 중 24위는 1968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됐다. 영호남지방에서 순교한 조윤호, 정원지, 한재권, 이명서, 손선지, 조화서, 정문호는 전주교구, 이윤일은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이윤일 성인은 충청도 홍주에서 출생하여 상주 갈골을 거쳐 문경 여우목에서 공소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11월 18일 문경관아에 체포되어 상주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양력) 관덕당 형장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