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박해(1859)와 그 이후 상황

관리자 2020.06.09 11:35 조회 수 : 214

  기해박해 이후 뜸하던 천주교 박해가 1859년 12월 말부터 이듬해인 1860년 8월까지 경상도 지역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 박해는 새 좌우 포도대장 신명순, 임태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포도대장에 의한 박해가 조선 정부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그들은1860년 5월 10일 파면됐다.
  이어 허계, 신관호가 새 좌우 포도대장으로 임명됐다. 이 포도대장들은 이 일을 소문없이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해 음력 8월 7일 철종의 명령으로 신자를 모두 풀어줌으로써 9개월 간의 경신박해는 끝났다.
  이 박해 동안 최양업 신부는 간월골 죽림에 장기간 숨어있었다. 이곳에서 최양업 신부가 쓴 19번째 편지에 경신박해 때 경상도 지방 신자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이 편지에 따르면 당시 남자 14명과 여자 3명 등 모두 17명의 신자가 체포됐다. 그중 3명은 배교해 석방되고, 2명은 서울로 압송됐으며, 1명은 경상감영으로 이송됐으나 풀려났다. 나머지 11명은 경주옥에서 문초를 당했다고 한다.
  이때 김 아가타는 박해를 받고 풀려나 죽림굴에서 최양업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선종했다. 김 아가타의 아버지인 김상은(야고보)과 오빠 김영제(베드로)도 투옥됐다가 풀려나왔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이 편지글에서 대구의 한 열심한 신자 노파가 순교했다고 전한다.

  대구에 열심한 노파가 한 사람 있는데, 그 노파는 많은 사람에게 교리를 설명하여, 교우촌을 세웠고 철저한 교리교육과 신심의 모범으로 교우촌을 지탱하여 왔습니다. 그 노파는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 용맹하게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한편 언양에 살고 있던 허인백(야고보)도 포졸들에게 체포돼 50일 동안 언양 옥에 갇힌 채 문초를 받다가 경주진영으로 이송됐다. 이송된 그는 영장의 심문을 받고 곤장 20대를 맞았으며, 큰칼을 쓰고 8개월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명에 의해 석방됐다.
  충주 장원에서 대구로 이사와 살던 서태순(베드로)도 1860년에 잡혀 대구진영으로 끌려간 뒤 영장의 심문에 주뢰와 주장, 곤장으로 무수히 맞아 팔과 다리가 끊어졌다. 그는 6개월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배교하는 말을 하고 돈을 바쳐서 풀려났다.
  또한 한티에서 1860년 2월 8일 이선이(엘리사벳)와 아들 배도령(스테파노)이 잡혀 현장에서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지며 시신은 후에 신나무골에 안장되었다.
  한티에 살고 있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전 바오로 형제는 난을 피해 달비골로 피신했다. 그 뒤 형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건학 교우촌으로 옮겨 살았다.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지방의 경신박해로 인하여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졌으며,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이들은 냉담하게 됐다고 전한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인들 중에서 예비신자들이 속출하였으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중략〉그러나 이번 박해로 인해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중략〉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졌고, 신앙의 뿌리가 갚지 못한 이들은 실망하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자로 보입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경신박해로 인해 수많은 교우촌의 파괴, 교우들의 신앙에 대한 불안과 불신, 외인에 대한 복음 전파의 어려움 등을 전하고 있다.
  이런 평가를 종합해보면 경신박해는 비록 좌우 포도대장이 국가의 승인 없이 일으킨 박해였지만 전교에 어려움을 주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고, 경상도지방에 형성된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신앙에 어려움을 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신박해 이후 조선 교회가 다소 침체를 겪는 동안 1861년 3월 청나라 산동 지방을 떠난 배로, 1859년과 1860년 두 번에 걸쳐 입국하려다가 실패한 랑드르 신부, 조안노 신부, 리델 신부, 깔레 신부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 교회가 경신박해를 극복하고, 2명의 주교와 7명의 프랑스 신부, 1명의 조선 신부를 모시고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려 할 때인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장티푸스와 과로로 40세의 나이에 선종했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조선 사람으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가장 힘든 산골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사목했고, 서양말로 된 교리책, 기도서 등을 틈틈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했으며, 천주가사를 지어 교우들이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유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제천 배론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