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박해(1827)

관리자 2020.06.09 11:34 조회 수 : 242

  을해박해 이후 1816년경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이 추진됐다. 정하상(바오로)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1822년경까지 9차례 북경을 왕래했다. 1821년경부터는 현석문(가롤로), 이경언(바오로) 등도 성직자 영입을 위해 함께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1824년 말부터는 유진길(아우구스티노), 1826년경부터는 조신철(가를로) 등이 참여했다. 1824년말에서 1825년 사이에 유진길 등이 교황에게 보낼 서한을 작성했다. 이 편지에는 성직자의 파견과 한국 교회를 위한 지속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827년 2월경 전라도 곡성 덕실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고, 천주교신자에 대한 밀고가 발생해 정해박해가 일어났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박해는 3월에는 주로 전라도 북부에 한정되다가 신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른 도의 신자들 이름도 드러나 박해가 다른 지방으로까지 번졌다.
  경상도에서는 그해 4월 22일 상주 잣골에 살고 있던 신태보가 체포돼 전주로 압송되고, 상주 멍에목에서 박경화(바오로), 박사의(안드레아) 부자, 상주 앵무동에서는 김사건(안드레아)과 안군심(리카르도), 봉화 곰직이에서는 이재행(안드레아)이 체포되고, 5월에는 김세박(암브로시오)이 안동진영에 나가 자수했다.
  이외에도 여러 명이 더 붙잡혀 경상도에서는 31명의 신자가 체포됐다. 이들 중 25명은 나이가 어리거나 교리를 잘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풀려나거나 귀양을 가고, 신앙을 증거한 박경화 등 6명은 경상감영의 감옥에 갇혔다. 그 후 1827년 11월 15일 박경화, 12월 3일 김세박, 1835년에 안군심은 사형을 기다리다가 옥사했다. 박사의, 이재행, 김사건은 기해박해 때인 1839년 4월 14일(음) 대구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