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성지 1. 칠곡 신나무골

관리자 2020.06.09 12:58 조회 수 : 392

1. 칠곡 신나무골

영남 신앙의 교두보

영남 신앙의 교두보 신나무골은 대구본당(계산주교좌본당)의 전신이다.

경부고속도로 왜관IC에서 빠져 나와 4번 국도를 타고 대구쪽으로 4km 정도 가면 길 오른쪽으로 연화읍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게 된다. 1km 남짓 가면 왼쪽으로 성 베네딕도 수녀원 연화동 피정의 집이 있고, 피정의 집을 지나 400m만 가면 좌측에 있다. 시골에 있는 성지답게 옛 모습 그대로 흙집이 정겨운 성지이다. 신나무골은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하리를 중심으로 한 신자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완정, 왜관의 가실, 장자터, 동명의 어골 등을 포함한 신자촌을 말한다.

신나무골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이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경기도 지방에서 피난온 교우들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산중에 살다가 또다시 박해를 받자 남쪽의 험한 산중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이곳 신나무골에 정착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더 가까이는 을해박해와 연관이 된다. 경상도 지역의 박해인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영양 일월산, 봉화 우련전, 곧은정 등지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 여명이 체포됐다.

체포된 신자들 중 33명이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면서, 이들 가족과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 중 몇 가정이 대구와 하루 거리로 가까우면서도 외딴 곳인 이곳 신나무골로 이주해온 것 같다.


선교사들의 대구 진출 전초기지

구전에 따르면 신나무골의 첫 신자는 을해박해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 가정이라고 한다. 그의 후손은 김종한 안드레아가 순교한 후 고향인 충청도로 갔다고 한다. 1862년 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서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 안드레아 가정이 부락민들의 박해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다. 이무렵 이이전 가정 외에도 인근 신자 가정들이 이사를 오면서 신나무골은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샤스탕, 최양업, 다블뤼, 리델 신부 등이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교구가 창설된 후 1837년부터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해 성사를 주곤 했다. 최양업 신부, 다블뤼 주교는 신나무골에 대해 “그 지방은 매우 작고 매우 의심을 받는 지역으로 20~30명 밖에 성사를 집행할 수 없는 공소이다. 그러나 이 지방은 큰 읍내의 작은 핵심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행한 지방이다. 그 큰 읍은 여러 시기에 걸쳐 순교자들이 많이 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흩어졌지만 박해가 끝나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모여 신자촌을 이루었다. 병인박해 후 이곳 신나무골에 부임한 김보록 로베르 신부를 비롯하여 보드네 윤 사베리오 신부와 조조 신부가 얼마간 머물며 사목하다가 대구와 전주, 부산 등지로 본당을 설립해 나갔다. 신나무골은 1895년 가실본당이 설립되면서 가실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으며 1926년 왜관본당이 설립되자 왜관본당의 공소가 되었고 1986년 2월 1일 신동본당이 설립된 이후는 신동본당 소속으로 되어 있다.


일찍 신학문 가르친 연화서당

대구대교구 최초의 교회로서 1895년 왜관에 있는 가실본당 공소로 출발한 신나무골에는 속칭 ‘연화서당’이라고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이 있었다. 연화서당은 영남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김보록 로베로 신부가 대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던 1883년 경 세웠다. 서울 약현(=명동)성당 ‘한한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친 곳이다.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인근 마을 아이들에게 신학문과 구학문, 천주교교리를 가르쳤다. 신나무골 성지개발은 1973년 왕 레지날도 신부가 모금운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1977년 7월 11일 제1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영남교회 선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왜관 성베네딕도수도회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터를 복원하여 김보록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과 전시관을 복원하고 김보록 신부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이선이 엘리사벳 잠들다

생나무를 깎아 만든 14처와 묘소 한쪽에 잘 보존돼 있는 옛 제대가 풍취를 더해주는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 앞에 서는 순례자들은 여린 아낙이면서도 장정네들 못지않은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 그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그가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 체포돼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안양동) 산21번지에 위치한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허락을 받아 이곳 신나무골로 이장되었다.

이선이의 남편인 성산 배씨(星山裵氏) 배정모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착실한 신앙 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860년 경상도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배씨 가족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칠곡읍에서 20여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난을 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배정모와 아내 이선이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 사기굴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만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성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배교를 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와 맏아들 배도령은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고 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목이 잘렸다. 모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였다.

남편은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한티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으로 부인의 유해만 이장했다가 다시 신나무골에 안장되었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57
◎ 연락처 : 천주교 대구대교구 신동성당 (054) 97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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