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성지 5. 계산성당

관리자 2020.06.09 13:06 조회 수 : 596

5. 계산성당

1886년 대구본당 세워져

천주교대구대교구의 주교좌본당인 계산성당은 1886년 초, 조선대목구 블랑 주교에 의해 설정됐다. 한국천주교는 병인박해시기에 교우가 1만4천 여명이었으나 1900년에는 4만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성장세를 감안, 블랑 주교는 대구본당을 설정하고, 김보록 로베르 신부를 초대본당 주임신부로 임명했다.
대구본당은 계산성당의 전신이다. 처음 대구본당은 신나무골에 임시로 정해졌다.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한티 교우촌을 포함, 관할지역에서 성사를 집행했다. 김보록 신부는 1898년 새방골(현 대구시 달서구 죽전동)로 거처를 옮겼고, 다시 1891년에는 경상도 지방의 실질적인 포교 중심지인 대구 읍내로 진출했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 현재 계산주교좌본당 자리에는 대구본당이 있었고, 1898년 12월 25일에는 한식 성당을 축성했다. 이 한식성당은 1900년 2월 4일 화재로 소실됐고, 1903년 11월 1일(모든 성인의 날)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서양 고딕식 성당을 축성했다. 대구 본당에 있던 대구 교회교육기관의 효시인 한문서당 해성재는 1908년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신학문 교육기관인 성립학교로 바뀌었다. 1909년에는 가톨릭청년회의 효시인 성립학우회를, 1912년에는 평신도사도직을 수행할 남방천주공교 명도회를 발족시켰고, 같은 해 ‘교회주보’를 창간했다.


대구대목구 설정되다

1910년 당시 조선대목구 뮈텔 주교는 한반도 남쪽을 관할할 남방교구의 설정을 시사했고, 대구와 전주가 물망에 올랐다. 당시 전주에는 신유박해 때 숨진 순교자 유항검(1756년~1801년) 등의 활약으로 신자수가 상당히 많았고, 순교자가 많이 배출되어서 남방교구 설정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구는 경부선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하였다. 또 경상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식 건물인 대구본당을 이미 건립하였고, 을해박해 정해박해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박해를 거치면서 신자들은 늘었고, 영성은 깊어졌다. 무엇보다 대구 본당 신자들이 교구를 유치하기 위해 뜨거운 열의를 보였다. 이런 배경으로 대구에 남방교구가 개설되었다. 남방교구를 관할할 대구대목구가 설정 되면서 초대 감목 안세화 드망즈 주교가 부임하게 되었다. ‘신뢰하고 일하라’를 사목 지표로 세운 안 주교는 뮈텔 주교가 배웅하면서 인사처럼 전한 ‘나눠줄 재산이 없으니 가난이나 함께 나누자’는 정신으로 대구에 부임하였다. 교구로서 갖추어야 할 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로 조선대목구로부터 가난만을 나누어 새 임지 대구에 부임한 안 주교는 1911년 7월 2일 대구대목구를 성모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주교좌성당 증축 등을 성모님께 허원

“성모님께서 새로 발족하는 이 교구의 빈약한 기금의 소비없이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이 되도록 도와주시면, 주교관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를 성모님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굴과 비슷한 굴을 마련하고 모든 신자들이 이곳에 순례하도록 내 있는 힘을 다할 것을 허원합니다.”
대구대목구가 설정되고 성모님의 도움과 신자들의 열의에 힘입어 주교관 건립(1913년 12월 4일), 성유스티노신학교 건립(1914년 10월 1일), 성모당 건립(1918년 8월 15일)이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이외에도 계산본당 신자들은 폴란드 전쟁 희생자를 위한 모금(1916년 1월), 러시아 백성을 위한 헌금(1922년 10월) 운동까지 펼쳤다. 이보다 몇 년 앞선 1917년 2월에는 1880년부터 시작해온 연령회 사업을 정착시키려고 인애회를 설립하였다. 인애회는 1880년대부터 시작되어온 연령회 사업을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연령회는 천주교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지역민들이 품고 있던 편견을 버리게 하였다. 연령회 사업은 천주교회의 이웃사랑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결실을 맺게 하였다. 전염병이 돌면 병에 걸릴까봐 누구든지 문을 잠그고 집에 있는데, 신자들은 병자를 찾아다니며 돌보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 성의껏 천주교식 장사를 지내주어 그 친척들이 장례식 이후에 스스로 찾아오게 되었다.


1918년 대성당의 종각 두배로 높아지다

1918년 12월 24일 계산본당 한윤화 김종학 등 신자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힘입어 대성당의 종각이 두배로 높아지고, 1902년 건축한 성당의 뒤편을 헐어서 나래를 달아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1919년 5월 11일 안세화 드망즈 초대 주교는 계산본당 초대 김보록 로베르 주임신부와 대성당을 축성함으로써 명실공히 주교좌 계산본당의 면모를 갖추었다. 계산본당은 루르드의 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대구대목구 내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대성당을 기반으로 영호남 지방 사목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계산본당에서 운영하던 해성학교 여자부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서 교사 수녀를 파견해주어 대구지역 여성교육 기관으로 사목적 성과를 거두게 되었고, 1925년 5월 15일 효성보통학교로 승격되어 대구지역 초등교육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일 남방천주교 청년회에서는 청년회 기관지로서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 전신)를 창간해 활발하게 청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천주교회보는 남방교구내 소식을 보도하고, 교회 발전에 대한 의견을 서로 나누며, 교회사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신자들이 단결하여 전진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천주교회보의 편집진에는 최정복 윤창두 이효상 김구정 등 다수의 본당 청년들이 참여하였다. 1931년 7월 7일 천주교회보는 교구기관지로 이관되었다. 가톨릭신문은 2007년 창립 80주년을 맞았다.


일제 말기 사제들 강제 연금 당해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스위스 출신 프르와드보 신부를 제외한 교구 내 모든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을 연금시켰다. 무세 주교를 포함한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을 남산 본당에 집단수용하였다.
1953년부터는 평신도 교리교사 혹은 전교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 요리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2년 7월 5일 계산동 대성당에서 대구대교구 승격 및 서정길 요한 대주교 착좌식이 거행되었고, 1972년에는 대구사회에 가톨릭문화를 심게될 계산문화관 건립을 착공, 1년 5개월만인 1973년 9월 26일 문화관 상량식을 가졌다. 계산성당은 1981년 대구시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고,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5일 대구대교구에서 청소년대회를 가졌고, 주교좌 본당인 대구 계산성당도 방문하였다. 이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구대교구의 젊은이들에게 “여러분의 성공은 여러분이 얼마나 헌신적인가에 달려있다.”며 한 마디로 “여러분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성심과 하나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1997년 11월 30일에는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주교 서품 은경축에 맞추어 천주교대구대교구 시노드 개막미사가 열렸다.


설정 120주년 맞아 새로운 도약 준비

2006년 6월 6일로 본당 설정 120주년을 맞은 계산성당은 계산문화관 2층에 유물사료관을 개관하고, 초본당적인 성서모임을 중심으로하는 새로운 21세기형 사목을 선보이고 있다. 계산성당에는 미사가 없는 날이 없다. 월요일에도, 일요일 밤 늦은 시간에도, 평일 새벽에도 미사가 거행된다. 출근길 직장인들도, 하루를 힘겹게 수고한 이들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리화(성화 스테인드글라스)가 은은한 빛을 발하는 계산성당을 찾는다.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십자고상이 교우들을 맞는다.
계산성당 종소리, 행복해요
고딕식 쌍탑으로 된 계산성당 종탑에서는 언제나 새벽 6시, 낮 12시, 저녁 6시에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녹음된 종소리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종탑에 올라가서 친다. 초창기 대구본당의 큰 공로자로 주교관 건립에도 부지를 희사한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국채보상운동 창시자)는 계산성당의 종소리를 듣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하루 세번씩 어김없이 들려오는 계산성당의 종소리는 알게 모르게 듣는 이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있다. 그만큼 계산성당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자연스레 스며들어있다.


천재들이 모이던 골든 델타의 핵심

성당 한쪽의 이인성 나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산성당은 과거 대구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던 골든 델타의 중심지였다. 시인(상화와 고월), 화가(이인성과 서동진), 문인(백기만과 현진건, 이효상), 독립운동가(이상정)와 서예가(박기돈 초대 대구상공회의 소장), 국채보상운동 창시자(서상돈) 등이 계산성당 인근에서 숨결을 나눴다. 계산문화관 바로 뒤편에 고택이 있는 민족시인 상화선생은 일제 탄압으로 가슴이 답답해지면 성당 마당으로 난 고택의 들문을 열고 바람을 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히 계산성당은 대구대교구의 심장이자 근대 대구문화예술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 지방 복음화에 헌신한 로베르 신부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 초대 주임신부 김보록 로베르(1853년~1922년)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이다.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두세 신부와 뮈텔 신부를 만나 함께 공부하고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다. 187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았고, 1882년부터 경상도 지방을 전담하게 되어, 신나무골을 거쳐 1888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러나 불량배들이 선교사와 교우들을 모욕하고 사제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구에서 추방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사와 정부의 교섭으로 다시 정부에서 로베르 신부를 대구로 호송함으로써 1891년 대구에 정착할 수 있었다. 김보록 신부는 30년간 이곳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조선대목구로부터 분리 독립된 이후 김보록 신부는 갖은 고난을 겪어가면서 대구본당의 기반을 다지느라 헌신하였다. 그러나 몸이 쇠약해져, 급기야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요양차 고국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다시 건강이 회복되어 1913년에 한국으로 나와 전교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에 병이 재발, 도저히 더 이상 전교할 수가 없게 되자 주교관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선종, 교구청내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2가 71-1번지
◎ 연락처 : 주교좌 계산천주교회 대표전화 (053) 254-2300
◎ 홈페이지: 주교좌 계산천주교회 http://www.kyes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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